중의적 의미의 유령들
ghosts in the in-between sense
연계 프로그램
exhibition-linked program
《중의적 의미의 유령들》의 전시 연계 프로그램으로 아티스트 토크를 진행합니다. 《중의적 의미의 유령들》은 퀴어 정체성과 경험을 픽션의 문법으로 재조합한 석(김민지)의 개인전입니다. 작품의 주제는 시, 이미지 내러티브, 게임 등 다양한 매체로 뻗어나가며 유기적인 세계관을 구성합니다.
아티스트 토크는 작가 “석”과 편집자 “(노)동자”의 토크쇼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동자는 전시 작품들의 서사적 기반이 되는 시집 『양질의 (픽셔널) 바이올런스』의 세계관을 해석하고, 석은 그 시들이 전시 작품으로 어떻게 확장되었는지 설명/변명합니다.
동시에 미등단/독립 작가로서 경험한 자본주의와 제도권 문화, 예술의 독립성과 사치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유령들”이 나아가야 할 나선형 스펙트럼에 관해 관객들과 모의/한탄해보고자 합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아티스트 토크 기록
artist talk & round table
동자: 원래 하자센터에서 하기로 한 아티스트 토크가 석이의 집에서 은밀하게 녹음되고 있습니다…. 이게 훨씬 더 재밌지 않을까 생각을 해요.
석: 맞습니다.
동자: 저는 동자고요.
석: 안녕하세요, 저는 석입니다.
동자: 아티스트 토크는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는데요, 1부는 저와 석이가 번갈아가면서 석이의 작품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석이가 어떤 문화적 영향을 받았는지 등등 이야기해 볼 예정입니다. 2부는 좌담회 형식으로 아주 편하게 진행될 예정이고, 어떤 제도에 편입되기를 희망하는 동시에 희망하지 않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해요.
석: 그리고 2부에서는 게스트로 참석해주신 시집의 디자이너 예하가 준비해주신 질문에도 한 번 답변을 하는 느낌으로 가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동자: 아주 풍성한 아티스트 토크가 되겠네요.
석: 한가위도 이보다 풍성할 순 없겠어요.
동자: (웃음) 제 발표부터 시작을 해볼까요?
동자: 안녕하세요, 저는 석이 출간한 시집 『양질의 (픽셔널) 바이올런스』의 편집자이자 OC 및 TRPG 문화를 통해서 석의 친구가 된 동자라고 합니다. 현재 상업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추어 이야기 창작자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싶지 않아서 여러모로 고민하는 중입니다.
지금부터 간략하게 석의 작품 세계를 제가 이해하는 방식을 여러분께 설명해드리려고 합니다. 여전히 ‘아마추어’인 만큼 제 해석 역시 제 주관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점 이해 부탁드립니다. 여기서 제가 스스로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아마추어’의 개념 역시 뒤에서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아, 너무 떨린다……. (웃음)
『양질의 (픽셔널) 바이올런스』는 작가가 영향을 받은 다양한 콘텐츠를 나열하면서 시작합니다. 저는 작가 석의 정체성을 어떻게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을까에 중점을 두고 편집했는데요, 제가 이 시집의 콘셉트를 잡는 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단어가 바로 ‘파편’이었습니다. 이 시집은 굉장히 독특한 시집입니다. 수록된 작품의 형식도, 내용도 다르지만 작품을 찬찬히 읽다보면 모든 작품이 느슨하게 이어져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거든요. 저는 이것이 마치 모자이크와 비슷하다고 생각해서 ‘파편’이라는 단어를 콘셉트 삼았습니다. 그렇게 콘셉트를 정하고 나니까 꼭 “다음과 같은 작품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장으로 이 시집을 열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하면 작가인 석 역시 다양한 미디어를 접한 뒤 그 내용을 스스로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창작의 동력을 얻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파편’이라는 개념을 시집에서 작가로 확장한 거죠. 그리고 이는 비단 석만이 경험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개인의 경험을 통해 익힌 깨달음으로 자신을 구성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거대한 퍼즐, 그리고 모자이크인 셈입니다. 그러므로 이 작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가 어떤 파편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독자가 알게 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 장이 탄생했습니다. 이 장에 적힌 다양한 레퍼런스를 얼마나 많이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중요한 조각은 바로 이 지점이었습니다.
“자캐 커뮤니티와 TRPG 참여를 비롯한 청소년기의 경험들.”
여러분들은 혹시 ‘자캐 커뮤니티’와 ‘TRPG’라는 단어에 익숙하신가요? 2010년대 이후 이 ‘자캐 커뮤니티’라는 단어를 다루는 논문이 여럿 출간이 됐어요. 그래서 이 두 개념이 학계로부터 완전히 유리된 개념은 아니라는 점을 먼저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저는 ‘자작캐릭터’라는 단어보다 ‘Original Character’라는 표현이 이 문화를 더욱 재밌게 표현하는 것 같아서, 지금부터는 이를 줄인 말인 “OC”를 사용하겠습니다.
OC 문화는 한국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문화입니다. 창작자 개인이 직접 만든 캐릭터를 가지고, 이 캐릭터로서 타인이 창작한 다른 캐릭터와 상호작용하는 문화 전반을 넓게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이때 개인이 직접 만든 캐릭터를 OC라고 부르기도 하고요. 보다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OC는 아마추어 창작자가 만든 캐릭터 그 자체와, 그 캐릭터를 가지고 타인의 캐릭터와 상호작용하는 문화 전반을 동시에 아우르는 말입니다. 한국 온라인상에서 자작 캐릭터 커뮤니티, 즉 ‘자캐 커뮤니티’는 굉장히 마니악한, 소위 말해 ‘씹타쿠’적인 문화로 인식되고 있어요. (웃음)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OC 문화 자체는 아주 오래된 개념입니다. 인간은 기원 전부터 이야기를 짓고 인물을 창조했으니까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존 르 카레는 작가입니다. 그리고 조지 스마일리는 존 르 카레가 창조한 캐릭터지요. 그렇다면 조지 스마일리는 존 르카레의 OC인 셈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셜록 홈즈는 아서 코난 도일의 OC지요. 존 왓슨 역시 아서 코난 도일의 OC입니다. 아서 코난 도일은 자신의 OC인 존 왓슨의 시점에서 자신의 다른 OC인 셜록 홈즈를 서술하는 식으로, 즉 자신의 두 OC가 상호작용하게 만들어 집필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현재 온라인상에서 이루어지는 OC 문화와 제가 말한 예시들이 너무나도 다른 차원의 취급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첫 번째, 조지 스마일리와 셜록 홈즈의 이야기는 기성 출판사에 의해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출판 권력, 그러니까 ‘문단’의 인정을 받은 셈이지요. 반면 온라인 상으로 이루어지는 OC 문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OC 문화 향유자들은 애초에 책으로 출간되어 상업적, 혹은 비평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다른 OC와 상호작용해 재미를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물론, 출판 권력에 진입하려는 창작자들이 OC 문화를 즐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하자면 무척 길어지니 지금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방금 ‘상호작용’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이 조지 스마일리, 셜록 홈즈와 OC 문화를 가르는 두 번째 조건입니다. 존 르 카레의 OC는 타인의 OC와 상호작용하지 않습니다. 아서 코난 도일의 두 OC 역시 마찬가지지요. 셜록 홈즈와 존 왓슨은 서로 상호작용합니다. 그런데 셜록 홈즈와 조지 스마일리는 상호작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OC 문화의 가장 중요한 재미는 타인의 OC와 내 OC가 만나 상호작용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OC 문화의 향유자들은 인물을 매개로 이야기의 공동 창작자가 되는 셈입니다.
여기서 잠깐! 저는 방금 굉장히 급진적인 논리를 펼쳤습니다. 아서 코난 도일, 존 르 카레와 어디로부터도 인정 받은 적 없는 OC 문화 향유자를 동치했죠. 방금은 OC 문화 항유자들 역시 ‘창작자’로 지칭했습니다. 이에 당황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두 부류는 모두 이야기를 만들고자 하는 욕구가 있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해 글을 썼습니다. 내면의 욕구로부터 출발해 무언가를 세상에 창작해 내놓은 것입니다. 숙련도나 결과물의 완성도에 차이가 있을지언정, 저는 두 집단 모두 ‘창작자’로 보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창작’의 영역은 무척 다르죠.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출판물은 형태가 고정됩니다. 출판물을 제작하는 과정은 굉장히 지난합니다. 내가 고정된 형태의 이야기를 출판사에 제출하면, 편집자가 검토하거나 수정해서 보완할 부분을 알려주지요. 원고는 오고 가면서 점점 더 형태가 고정되고, 결과적으로 종이에 인쇄되어 활자로 박힙니다. 인쇄된 책에 수정을 가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편집자가 약간의 의견을 더할 수는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이야기를 적는 것은 작가 본인의 몫입니다. 그런데 OC 문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문화는 즉각적으로 소통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무척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A라는 캐릭터와 B라는 캐릭터가 있습니다. 이 두 캐릭터는 C라는 회사에서 같이 근무합니다. OC 문화는 즉각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집니다. A는 B와 같은 부서에서 일하나요? 아니면 다른 부서에서 일하더라도 서로 협업한 적이 있나요? A의 평판은 어때요? B의 평판은요? 세간의 평가에 서로 동의하는 바인가요? 둘 사이 어떤 일이 있었나요? 그게 아니라면, 어떤 일을 함께 겪는 중인가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대화를 주고 받을까요? 서로의 말에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이 이야기는 어디로 흘러갈까요? A 캐릭터를 만든 사람과 B 캐릭터를 만든 사람은 서로 설정을 조율하면서, 혹은 캐릭터의 행동이나 대사로 이 질문에 답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창조하기 시작합니다. 즉흥극과 매우 유사한 형태지요. 이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는 놀이에 참여하는 두 사람 모두 알 수 없습니다. 그냥 가늠할 뿐이지요. 이렇게 서로 합을 맞추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인하는 예상 외의 변수가 OC 문화의 가장 큰 재미입니다.
저는 방금 A 캐릭터와 B 캐릭터의 예를 들면서, 이 둘이 “C라는 회사에서 같이 근무한다”는 설정을 덧붙여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배경을 제시했습니다. 무대를 세운 셈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이곳에 왜 모였는지는 알아야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겠죠? 작가가 어떤 이유가 생겨 어떤 작품을 집필하기로 결심하는 것처럼요.
이렇게 배경을 제시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바로 TRPG입니다. TRPG는 굉장히 세밀한 세계를 제시합니다. 캐릭터가 기반으로 삼을 수 있는 세계관을 제공해서, 캐릭터를 창조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수를 ‘설정’으로 알려주는 것입니다. 노련한 작가는 백지로부터 세계관을 쌓아올릴 수 있습니다. J.K. 롤링이나 조지 R. R. 마틴처럼요. 하지만 모두가 그 정도로 세계를 쌓아올리는 데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과정에서 재미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고요. 그게 아니라면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에만 집중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한계점이 생기기 마련이죠. 놀이에 걸림돌이 생기는 것입니다. TRPG는 이렇게 형성된, 창작자로서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고 싶은 창작자를 위해 나름의 밑바탕, 혹은 거대한 틀을 제시합니다. 이야기를 창작하는 데 훌륭한 도구인 셈입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많은 것이 덧붙일 수 있습니다. 캐릭터의 설정을 수치로 표현해 이 수치를 올리는 데 집중할 수도 있고, 수치를 기반으로 주사위를 굴려 행동의 성패를 결정할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 흐름상 전투나 추격 장면, 즉, ‘액션씬’이 벌어진다면 이를 텍스트로 구현하는 데에서 재미를 느낄 수도 있겠습니다. 요즘은 이야기에 몰입하기 위해서 TRPG 중 배경음악을 추가하거나 각종 특수 효과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TRPG의 본질은 여전히 상호작용과 이야기에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타인, 혹은 나 자신과 상호작용하는가? 어떤 TRPG 룰은 홀로 진행할 수도 있습니다. 주사위를 비롯한 각종 부가 요소 없이 연필 하나만 있으면 진행할 수 있기도 하고요. 석의 작품 중에서도 그런 작품이 있었죠? (웃음)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만들어나갈 것인가?” 입니다.
OC 문화, 혹은 TRPG 문화는 좋은 글쓰기 및 연기 훈련입니다. 이 이야기는 아주 작게 시작됩니다. 그런데 조금씩 커지기 시작합니다. 캐릭터가 상호작용하면서 형성되는 이야기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저는 위에서 예측불가능성, 혹은 변수가 이 문화의 가장 큰 재미라고 말한 적 있습니다. 실제로 TRPG에서 마스터 혹은 수호자를 맡은 이들은 플레이어들의 행동에 즉각적으로 반응해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그 과정에서 룰북이나 시나리오에 적히지 않은 곳으로 이야기가 돌출할 수 있습니다. OC 문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캐릭터와 타인의 캐릭터가 함께 있어야만 탄생하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이런 예상 외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창작자의 통제권을 벗어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플레이어가 상점에 갔습니다. 그런데 이 플레이어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 자신의 캐릭터는 돈을 주고 이 상점에서 물건을 살 것 같지 않은 인물이니 물건을 훔치겠다고 선언하는 겁니다. 충분히 가능한 상황입니다. 절도는 우리 사회에서도 빈번하게 발생하는 범죄고, 자신의 캐릭터가 사회적 도덕선을 준수하지 않은 캐릭터라 그런 범죄를 저지를 성향이라면 충분히 훔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TRPG 룰북에, 혹은 우리가 창조한 세계에서 과연 이가 가능한 행위일까요? 여기서부터 창작자의 재빠른 창작이 필요합니다. 이야기가 창작자의 통제권 너머로 돌출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통제권을 다시 되찾아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가 이어질 수 없으니까요!
TRPG 용어로는 흔히 “레일을 깐다”라고 표현합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의 방향을 순간순간 재빠르게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상대에게 물어볼 것입니다. 이 캐릭터는 도둑질에 능한가요? 들킨 적이 있나요? 그리고 자신에게도 묻게 됩니다. 이 상점의 주인은 눈썰미가 좋을까? 이 가게에 도둑이 든 적이 많을까? 누가 자신의 가게에서 도둑질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에 능숙하게 대처할까? 이 세계에서 절도는 얼마나 큰 범죄인가? 세계는 자연스럽게 확장됩니다. 여기서 “캐릭터가 도둑질에 능해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유유히 가게를 빠져나왔다”부터 “초짜 도둑인 캐릭터는 물건을 훔치다 말고 걸렸고, 상점 주인이 재빨리 신고해 경찰에게 쫓기게 된다”까지 굉장히 다양한 변수가 발생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캐릭터 및 세계가 ‘되었’고, 그리고 타인과 상호작용하며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를 결정했습니다.
앞서서 저는 OC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 역시 엄연한 ‘창작자’라고 설명했습니다. OC 문화 향유자와 TRPG 플레이어 역시 이야기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OC 문화는 ‘OC’로서 상호작용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OC를 만든 사람은 도둑질을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OC는 설정상 거기서 도둑질을 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니 OC의 입장에서 도둑질을 시도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액션이 일어났죠. OC 문화 향유자들과 TRPG 플레이어들 모두 서로 어떤 행위까지 가능한지, 이 이야기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메타적으로 합의를 거칩니다. 오프라인에서 TRPG를 할 때, 테이블 중앙에 ‘X’가 그려진 포스트잇을 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야기를 만들다가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갈 경우, 혹은 내가 수용하지 못하는 주제가 나왔을 경우, 내가 이 주제를 논할 때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포스트잇을 눌러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방금 있었던 선언도 이와 동일합니다. 우리는 “도둑질했고, 이 물건은 이제 제 것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도둑질을 해볼게요”라고 나의 행동을 선언했습니다. 그럼 상대가 이 행동이 자신의 입장에서 수용가능한지 판단하고 서로 합의 하에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것이지요. 이처럼 최소한의 의사 표현 창구를 만들어 두기는 하지만, 중점은 내가 어떻게 그 캐릭터처럼 행동하면서 이 이야기를 끌고 나갈지에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앞서 말한 것처럼 어느 정도 그 캐릭터가 ‘-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되기’에 대한 들뢰즈의 이론을 들먹이지 않고 직관적으로 설명해보겠습니다. 존 르 카레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쓰면서 얼추 조지 스마일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어느 정도로 스마일리가 ‘되었’는지는 정확한 수치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르 카레는 자신이 겪었던 일과 이를 통해 느꼈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언어로 스마일리라는 인물을 창조했고, 거기에 분명 자신의 일부를 떼어두었을 것입니다. 아서 코난 도일이 『셜록 홈즈』 시리즈를 쓰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그가 자신의 스승을 셜록 홈즈의 모델로 삼았다는 일화는 꽤나 유명하지요. 이처럼 창작자가 세상을 보는 방식과 그를 통해 경험한 일들은 아주 분명히 그의 창작물에 영향을 줍니다. 그가 어떤 창작 문법에 익숙한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OC 문화 향유자, 혹은 TRPG 플레이어들은 이 ‘-되기’를 기성 작가들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경험합니다. OC 문화를 향유하기 위해서 자작 캐릭터 커뮤니티에 가거나 TRPG를 시작하게 되면, 정말 직접적으로 그 캐릭터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향유자들은 그 캐릭터‘로서’ 대화를 나눕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성 작가들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자신이 직접적, 간접적으로 경험한 것을 OC 캐릭터로 쏟아내기 마련입니다. 방금 제가 든 예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창작자는 자신의 OC가 상점에서 물건을 훔치는 캐릭터라고 설정했습니다. 이 행동을 통해 이야기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이 있을 수도 있고, 그게 자신의 캐릭터가 수행해야만 하는 클리셰의 일종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걸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창작자는 자신의 캐릭터가 ‘되어’ 그 행동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창작자가 OC에게, OC가 창작자에게 서로 흔적을 남기는 것입니다.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면 두 사람이서 릴레이 소설을 쓴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런데 이 소설은 3인칭 시점으로 출발하지 않고, 캐릭터 개인으로부터 출발해 1인칭으로 쓰입니다. 내가 어떤 인물이 ‘되어’, 그 인물이 놓인 상황에서 그 인물이라면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을 텍스트로 ‘수행’합니다. 이렇게 정리하니 굉장히 퀴어하게 느껴지죠? 이 지점이 바로 제가 주목하고 싶은 지점입니다.
그런데 사회가 환경이라면, 말함으로써 특정되는 부분보다 언제나 말해지지 않는 나머지가 더 클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말하기도 원칙상 소수성을 내재하고 있다. 만약 그러한 나머지가 적거나 없는 종류의 진술이 있다면, (“착하게 살자”와 같은 관습적 표현이 그러하듯) 바로 그렇기 때문에 환경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보편성을 직접 표상하지 않는 아주 작은 크기의 관점과 말하기가 갖게 되는 고유한 힘이 있다. 그것은 표상의 측면에서 작지만 영향의 측면에서 보편적일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어떤 말이 아니라 어떤 말들을 만들 수 있는, 문화를 생산하고 우리 자신을 재생산할 수 있는 행위의 최소 단위를 조명하고 싶다.
[출처] 「아마추어리즘의 사회, 그리고 예술」, 이여로 (2021), 『문학과사회 하이픈지 문학–사회』
자신이 아닌 것이 ‘되고’, ‘수행’합니다. 우리는 이 문화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짓습니다. 한계와 지속적으로 마주하고, 돌출하는 부분을 흡수하기 위해 자신의 지평을 넓힙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타인의 권력은 필요하지 않고, 이야기는 오롯이 참여하는 모든 창작자의 것으로 귀속됩니다.
‘아마추어’의 특권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아직까지 아마추어(리즘)은 개념이 아니다. 전문성이나 탁월함의 반대항으로 규정 당하고 있을 뿐이다. 때론 ‘열정’ 같은 순수함의 이념을 할당 받지만 대체로 “규칙의 권외 지역, 그저 일시적인 소규모 규칙들이 산발적으로 꿈틀대다 더 큰 규칙 집단에 흡수되는 곳, 혹은 문화의 폐기물 처리장”이거나 대피소 역할을 맡고 있다. 즉, 우리는 전문성보다 훨씬 거대한 그것의 여집합에서 고작 위와 같은 것들만을 조명하며 부정과 결여의 윤곽을 더듬고 있을 뿐이다. (중략) 체계를 만드는 한 가지 방식은 자기에게서 산출된 것을 다시 자기에게 되돌리는 것이다.
앞선 글과 같은 글에서 나온 문단입니다. 한국에서 ‘아마추어리즘’의 개념을 가장 활발하게 논하고 계신 이여로 선생님의 글인데요, 저는 이 글보다 TRPG 및 OC 문화의 향유하는 사람들을 잘 묘사하는 글을 알지 못합니다. 굉장히 먼 길을 돌아온 셈입니다.
저는 이 ‘아마추어’로서의 존재감이 석과 저를 비롯한 각종 TRPG, OC 문화 향유자들과 굉장히 강렬하게 공명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제도권에 들지 못합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제도권에 드는 것은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목표가 아닙니다. 창작이 온전히 창작 그 자체에 귀속될 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가 튀어나올 때 우리는 재미를 느낍니다. 그리고 저는 궁극적으로 이 경험과 석이 작품 세계를 형성하는 방식이 아주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석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긴 설명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동: (환호)
동자: 석의 작품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석은 굉장히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을 만듭니다. 웹사이트부터 반응형 게임, TRPG 룰도 있죠. 영화나 사진, 시집처럼 이미 충분히 ‘상업화’된 장르의 창작물을 만들 때에도 기존 상업 작품이 구사하지 않는 방향으로 작품을 제작하고는 합니다. 석의 작품들은 모두 보는 이와의 상호작용을 전제에 두고 있습니다. 게임이나 TRPG, 웹페이지는 보는 이가 클릭을 하거나 명령어를 입력하지 않으면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석의 작품 대다수는 이렇게 상호작용해서 얻은 이야기를 굉장히 파편적으로 제시합니다. 우리가 「철새들의 집」이나 「pump the wreck, kid!」 같은 작품에서 제공하는 모든 텍스트를 발굴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이를 조립해서 해석하는 것은 오로지 보는 이의 몫입니다. 여러분은 이 작품을 읽고 어떤 이야기를 만들었나요? 그리고 이 이야기가 무엇을 다룬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마 보는 이에 따라서 다를 것입니다. TRPG나 OC 문화를 향유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타인과 상호작용해 어떤 이야기를 만드는 ‘경험’을 합니다. 그리고 이 경험은 다시 개인을 기워서, 다음 창작물을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되고는 하지요. 저는 작가인 석이 보는 이와 이런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는 것이, 그리고 이런 장르의 작품을 만드는 것이 굉장히 정합하게만 느껴집니다.
앞서 기존 출판물은 활자로 박혀서 종이에 고정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석의 기반이 된 문화는 이를 허용하지 않는 문화였습니다. 이 문화에서 글자들은 실시간으로 형성되고 사라지며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이는 「pump up the wreck, kid!」나 「철새들의 집」 같이 텍스트를 기반으로 하는 웹 작업에서 특히 두드러집니다. 향유하는 자에게 선택지가 주어졌습니다. 웹으로 코딩된 글자는 화면을 유영합니다. 그들은 깜빡이면서 나타나고, 이미 한 번 클릭된 글자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듯 별색으로 강조되기도 하지요. 웹 작품의 특성을 극대화한 셈입니다. 한편 「to the moon and back」은 여기서 향유자에게 줄 수 있는 자유의 범위를 백지로 확장하여, 석이 창작하는 과정의 뿌리로 돌아가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종이만 있으면 플레이할 수 있는 1인 TRPG 룰은 향유자에게 무한에 가까운 선택지를 제공합니다. 코딩으로 짜넣을 수 있는 선택지의 개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혹은 무지막지하게 많은 텍스트를 짜 넣어서 마치 ‘무한해 보이도록’ 설정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이는 1인 창작자에게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글자를 다시 종이로 불러오되, 그 종이 위에 독자가 직접 글을 써넣을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면, 경우의 수는 창작자의 개입 없이 오롯하게 향유자의 몫이 됩니다. 발송 오류 에디션인 진을 읽어보면 석의 이러한 고민이 잘 녹아 들어가 있습니다. 저는 창작자로서 석이 굉장히 대담하고 솔직한 창작 방법을 찾은 것 같아, 이 작업물을 몹시 좋아합니다.
한편 제가 편집한 작품은 석의 시집이지요. 시집은 웹아트나 TRPG 룰과는 다릅니다. 아까 여러 번 말씀드린 것처럼, ‘활자로 박혀서 종이에 고정됩니다.’ 저는 고정된 형태의 시집이 독자와 어떻게 상호작용할 수 있을지 고민했는데, 그 과정에서 디자인의 힘을 많이 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작품의 종류를 나누어서 종류마다 내지 디자인을 다르게 한 것이 가장 첫 번째입니다. 책을 읽어나갈수록 자연스럽게 작품마다 글자의 쪽수와 소제목 표기, 글자 자간, 폰트, 배열이 유동적으로 변하게 한 것이지요. 읽는 이와 상호작용한다는 느낌을 주고자 나름 노력한 바였는데,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하네요. 두 번째는 목차를 가장 마지막에 배치한 것입니다. TRPG를 비롯한 창작자 간 상호작용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 책의 도입에 목차를 두는 것은 왜인지 재미를 반감시키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목차가 책의 마지막에 오니 엔딩 크레딧 느낌도 들고, 그리고 이 책을 복기하는 장이 된 것 같아 책 내용과 잘 어울리는 듯 싶습니다. 사실 이렇게 책의 내지 디자인에 지속적으로 변화를 주거나 목차를 마지막에 배치하는 것은 기존 출판계에서 금기시되고 있는 사항입니다. 독립출판이라면 모를까, 여러분이 오프라인 서점에 가서 찾을 수 있는 책 중에서 이런 식으로 편집이 된 책은 아마 찾기 힘드실 겁니다.
저는 이 책의 해설을 적으며 “자랑스럽게 관습으로부터 벗어나자.”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석의 작품에 나오는 존재들은 모두 관습에서 벗어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석의 작품이 이런 인물들이 등장하는 토대, 즉 ‘집’이 된다면, 그 집 역시 당연히 관습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석의 창작물들은 ‘퀴어’합니다. 정형에서 벗어났습니다. 이들은 당신이 기꺼이 잊고 싶어하는 존재, 당신이 외면하는 존재, 그리고 당신이 받아들이기에 *이상한 존재*입니다. 저는 퀴어-되기의 경험이란 타인이 재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께 다시 상기시켜 드리고자 합니다. 퀴어는 원래 이상합니다. 제정신이 아니기도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웃음) 이는 석의 첫 번째 웹아트인 「사람을 찾습니다: 밀려난, 살아 있는.」에도 잘 나와 있는 바입니다. 저는 이 작품에 인터뷰이로 참여해서 텍스트를 제공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석과 저는 모두 퀴어-되기는 단순히 “나에게는 사회에서 쉽사리 인정받기 힘든 면모가 있습니다”라는 문장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 동의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당신은 레즈비언입니다. 직장 동료들은 당신이 레즈비언일 것이라는 상상조차 하지 못합니다. 이는 우리 사회의 퀴어 가시화가 턱없이 부족하기 떄문에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죠. 점심 시간 스몰톡으로 누군가가 “주말에 뭐했어?” 라고 물어봤습니다. 당신은 주말에 당신의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진솔하게 답한다면 동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럼 당신은 그 질문에 대답을 흐지부지 거짓말로 넘기게 되고, 그 과정에서 당신이 사회적으로 상호작용하고 있는 순간, 혹은 레즈비언이라는 당신의 정체성이 상처 입게 됩니다. ‘퀴어-되기’는 이러한 상황의 연속입니다.
왜 우리는 자꾸 OC가 ‘되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렇게 다른 OC와 상호작용하기를 자꾸 바라는 것일까요? 앞서 서는 재미를 가장 큰 이유로 꼽았습니다만, 이제 와서 새로운 이유를 하나 더 제시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되지’ 않고서는, 그리고 그 ‘되기’의 기반이 없이는 사회로부터 밀려난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아닌 무언가가 ‘되고’, ‘수행’하며 다른 이들과 연결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서사 통제권을 되찾아 오고자 합니다. 석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키워드 중 하나가 ‘복수’잖아요? 이렇게 자신의 통제권을 가져오는 과정에서 남을 침범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우리 개인은 ‘복수’를 시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내 이야기니까요.
저는 지금까지 한계 밖으로 돌출하는 존재, 경계를 허무는 존재, 밀려난 존재, 그리고 경험을 재해석해 자신의 존재를 깁는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출판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가끔 책의 형태에 회의감을 느끼고는 합니다. 상호작용할 것이 이렇게나 많은 시대에, 책은 뻣뻣하기 짝이 없는 콘텐츠니까요. 나름대로 변주를 주고자 노력했지만, 결국 이 시집은 시집의 형태로 고정되었습니다. 또한 석의 작품이 퀴어한 존재들의 집이 되어줬다고 말하기도 했죠. 상호작용을 목표로 하기는 했지만, ‘집’ 역시 형태가 고정되어 집 안과 집 밖을 가르게 됩니다. 저 역시 석의 작품을 어떤 논리에 따라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제가 호명해 해석하지 않은 석의 작품 세계 역시 있을 테지요.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석의 작품 해석이 바로 이 형태로 고정되었습니다. 저는 석의 작품을 감상한 여러분 역시 이 작품에 미처 담기지 못한, 집 밖의 존재들을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퀴어’라는 단어를 듣고 떠올리는 모든 가능성의 바깥에도 누군가 존재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존재는 개념을 선행합니다. 우리가 계속 한계를 넘고 경계를 허물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추어’의 해석을 들어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 해석의 수용 역시 오롯하게 듣는 이에게 맡기겠습니다.
일동: (박수와 환호)
석: 안녕하세요, 저는 시집 『양질의 (픽셔널) 바이올런스』를 집필하고 전시 《중의적 의미의 유령들》을 개최한 석입니다. 자랑스럽게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언더그라운드나 인디씬에 머무르고 싶지만, 동시에 자본주의와 제도권이 인정하는, 그럼으로써 복지의 범위에 포함될 수 있는 창작자가 되고 싶다는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동자가 앞서 해석해준 저의 세계관에 짜치지 않을 정도 만큼의 제 해석 또는 변명을 덧붙일 예정입니다. 그리고 작품들을 모은 이번 전시는 어떻게 기획되고 준비되었는지에 관해 최대한 기억을 더듬어 복기해보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창작자로서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하고자 하는지 현재의 불안정한 고민을 가볍게 언급해볼 예정입니다.
조금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이어가 보겠습니다.
시와 게임 등 제가 만든 작품에 관해 설명할 때 개인적으로 가장 곤혹스러운 건 이게 어떤 작품인지 상대가 물어볼 때인 것 같습니다. 저는 그들이 구구절절한 설명을 원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한 줄로 깔끔하게 요약된 문장을 원합니다. 그런데 그 문장을 들은 후에는 상대가 납득 혹은 설득이 될 때까지 다시 구구절절 부연설명을 덧붙이길 바랍니다.
일동: (웃음)
석: 이런 맥락에서 저는 시집 『양질의 (픽셔널) 바이올런스』를 설명할 때 “개인적인 경험을 픽션의 문법으로 재조합한 시집”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시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사건은 제가 ‘직접’ 경험한 것도 아니고, 몇몇 인물들은 제 ‘OC’가 아니기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개인적인 경험은 시 안에서 가상의 인물들이 가상의 사건을 겪으며 느낀 감정들이 제가 현실에서 느꼈던 감정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일단 해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시집에 수록된 몇몇 시의 내러티브가 확장되어 스토리가 이어지는 작품들에 대해서는 “이러한 시를 바탕으로 디지털 매체로 뻗어나간 작품들”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 설명이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한 줄 안에 그래서 이것들이 ‘어떤’ 작품인지에 관한 정보가 충분히 담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전시에 걸린 작품들을 설명할 때 형식적·매체적으로는 ‘트랜스미디어’라는 한 단어로 깔끔하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단어는 “그래서 왜 이 작품들이 트랜스미디어여야만 했는지”에 관해서는 설명해주지 못합니다. 그럼 기껏 한 단어 혹은 한 문장으로 잘 정리한 설명 아래로 구구절절한 변명과 해명이 이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저는 자신의 창작물을 설명하는 예술가가 아니라 마치 고객을 설득하는 영업사원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낍니다.
저는 제가 쓴 시들에 대해, 제가 만든 작품들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웃음) 각각의 작업물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시 하나만으로도 1시간은 거뜬히 떠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원하지 않습니다. (일동 웃음) 사람들은 한 줄로 요약된 설명을 원합니다. 그리고 이 지점이 왜 제게 특히 어려웠느냐에 대해 생각해보았을 때, 제가 저에 관한 대부분의 요소들을 한 단어로 정의내리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케네스 골드스미스는 『문예 비창작』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트랜스젠더는 태어난 대로가 아니라 현재 있는 그대로의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다. 트랜스섹슈얼 또한 그들 자신을 계속 다시 만들어가는 상태로, 새롭고 유동적인 정체성을 취하고자 용감히 평생을 바쳐 힘든 일을 지속한다.”
새롭고 유동적인 정체성을 취한다는 것은 한 단어로 정의내릴 수 없는 스펙트럼 내에서의 유랑 또는 부랑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제가 정말 좋아하는 레거시 러셀의 『글리치 페미니즘』도 함께 인용할 수 있겠습니다.
“온라인 세계에서는 나는 누구든지 될 수 있었다. (...) 그리고 이런 스토리텔링과 변신술을 통해 나는 부활했다. 나는 내 범위를 주장했다. (...) 나는 채팅방에서 여러 신체성들(corporealities)을 입어보았다.”
“글리치 페미니즘은 ‘중간성(the in-between)’을 생존에 필요한 핵심적인 요소로 생각해보길 권고한다. 남성적이지도 여성적이지도 않으며 남성이지도 여성이지도 않은 대신, 우리가 스스로 정하고 정의하며 자율권을 갖는 광대한 범위가 되기를 택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디지털은 자아영역의 변주를 일으키는 촉매가 되어준다. ‘투명인간’인 우리 각각에게는 우리 자신의 반영을 스스로 구현할 책임이 있으며, 오늘날의 인터넷을 통해 서로를 위해 거울을 들어주는 방법을 모색해 나갈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디지털 상상을 기회로, 건축을 위한 현장과 재료로 쟁취해 보는 해방적인 임무를 통해 행위자성을 얻게 된다.”
“우리에게 자리를 내어주지도 않고, 안식처를 제공해주지도 않는 디스토피아와도 같은 국제적 환경 속에서, 젠더화되고 인종화된 헤게모니 아래 그저 살아가는 것, 살아남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정치적인 것이 된다.”
전시 서문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작품의 주제에 관해 “서로 일치하지 않는 신체와 정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이 표현은 앞서 동자가 이야기한 ‘-되기’ 행위와 맥락적으로 연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동자는 “OC 문화 향유자, 혹은 TRPG 플레이어들은 이 ‘-되기’를 기성 작가들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경험한다”고 하면서, “그 과정에서 창작자가 OC에게, OC가 창작자에게 서로 흔적을 남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설명을 골드스미스, 러셀과 함께 언급하면서 제가 왜 제 경험을 기반으로 한 시를 쓰는 데에 가상의 인물들, 즉 저의 OC, 그리고 다른 창작자들의 OC를 차용하고 전유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남에게 공감이 잘 안 됐습니다. (일동 웃음) 저는 현실에서 눈 앞에 있는 사람의 슬픔보다 인터넷 너머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의 슬픔이 항상 더 크게 느껴졌고, TV 속의 캐릭터들이 겪는 슬픔은 더욱 크게 느껴졌습니다. 현실에서 눈 앞에 있는 사람이 울면 곤혹스럽고 짜증이 나는데, 영화나 드라마 속 가상의 인물이 울면 저는 밤새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는 제가 이런 사람이라는 걸, 그리고 이게 굉장히 이상하다는 것을 OC 문화와 TRPG를 경험하면서 깨닫게 되었는데요. 제 스스로의 결함이 참을 수 없이 혐오스러울 때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하지만 저와 같은 결함을 가진 제 OC들, 그리고 미디어 속의 캐릭터들에게는 그 결함이 보일 때마다 오히려 연민과 공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다른 OC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제가 현실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사건들을 경험하고, 하고 싶었지만 현실에서는 할 수 없었던 선택을 하고, 현실에서는 맞이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결말을 맞이하며 청소년기를 포함해 아주 오랜 시간을 보내며 자랐습니다.
타인의 OC와 실시간으로 상호작용을 할 때에는 전유나 표절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의 장면들을 오마주하여 대화를 구성하고, 캐릭터의 전반적인 서사나 설정에 좋아하는 캐릭터의 요소를 반영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저는 제가 현실에서 될 수 없는 어떤 존재가 ‘되기’를 실천하며, 해소되지 않는 불만족 혹은 불행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동자가 시집의 작품 해설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자신이 아닌 단어들로 자신을 정의”하는 존재가 되고, “남의 언어를 훔쳐다 자신의 언어 삼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자동적으로 그 행위 자체에 당위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주체에게 마치 그것이 자연스러운 행위인 것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말이 어려웠죠? 조금 더 단적으로 설명해보겠습니다. 저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 신체와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서 경험을 시에 담고자 했을 때, 또한 이런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왜 내 경험을 이야기하기 위해 내 이야기를 해야 하지? 어차피 사람들은 밈만 있으면 다 소통이 되는데.” (일동 웃음)
저는 한 번도 제가 경험했던 사건들과 그로부터 발생한 제 감정들을 누군가에게 설득시키거나 납득시켜야 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적어도 작품으로는요. 시집을 포함해 전시를 기획하고 준비할 때에도 그냥 이런 존재들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툭 던져놓고 싶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그에 대한 반응이 어떻기를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제 목표가 이런데, 왜 제가 사적으로 내밀한 이야기들을 속속들이 꺼내 보여줘야 할까요? 꼭 같은 사건을 겪지 않아도 같은 감정을 느끼게는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가상의 세계, 가상의 인물, 가상의 서사를 만들어 제가 그것이 되는, 그리고 그것을 경험하는 다른 사람들 또한 그 존재가 되어 자신만의 경험을 할 수 있는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시와 게임이 제 세계에서 주된 매개체이자 매체로서 작용하는 이유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서로 일치하지 않는 신체와 정신”이라는 주제의 작품들이 왜 “트랜스미디어” 매체로 구현되어야 했는지에 대해 설명이자 설득이자 변명을 해봤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왜 하필 또 ‘시’와 ‘게임’이어야 했는지 동자가 앞서 설명한 내용들과 함께 제 의견을 덧붙였습니다. 여기까지의 들으셨다면 왜 전시의 제목이 《중의적 의미의 유령들》인지 어렴풋이 이해가 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전시 서문은 또 다시 전시 제목의 의미를 구구절절 설명합니다.
저는 서문에서 유령들, 즉 ‘우리’를 다음과 같이 풀어 설명했습니다. “여전히 무시되거나 상품으로 재포섭되는 유령들, 혹은 그 유령들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 살아있으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또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여겨지는 것들. 존재 이유를 증명하라고 재촉받거나, 존재 이유를 거세당한 유령들.” 그리고 “0과 1로는 설명되지 않는 몸을 이끌고 나선형으로” 움직이는 존재들. 여기서 ‘나선형’에 관한 이야기는 2부에서 조금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조금 어두워지는데요. 다들 준비되셨나요? (일동 웃음)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들었던 피드백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퀴어 정체성과 경험은 지금 미술계에서 굉장히 흔한 주제”라는 말이었습니다. 퀴어 뿐만 아니라 소수자 예술은 여전히 한국에서 굉장히 터부시되는 분야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눈치챈 것은 사람들이 퀴어를 터부시하는 동시에 때로는 소재화 혹은 페티쉬화 하기도 하고, 이 모든 현상을 이야기하는 목소리에 대해 “지겹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내 주변에 없어.”와 “그런 사람들 세상에 널렸어.”가 공존하는 이 유령들의 평판이자 소문에 대해 저는 그 그룹에 속하는 유령이자 사람으로서 이유를 선행하는 존재를 호명하고자 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또 다른 피드백이자 가장 주기적으로, 꾸준히, 여러 번 들어온 피드백은 “이걸 왜 하필 오프라인 전시로 해야 하느냐”였습니다. 제가 아웃팅을 두려워 해 가족들이나 지인들을 초대하지 못할 예정이라고 이야기 한 순간부터 이 질문은 전시 오픈 전날까지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사람들에게 존재가 알려지는 게 두려워 초대도 하지 않을 것이라면 왜 공간과 자원을 낭비하려 드느냐는 것이죠. 아주 안전하고 폐쇄적인 “웹”이라는 공간이 있는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누구도 방문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뜻을 가진 전시가 한 번쯤은 열리는 것이, 그리고 그 전시를 제가 목격하는 것이 저에게 꽤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전시장 자체를 닫힌 듯 열린 공간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으로 일차적인 디펜스를 했던 것 같습니다. 이곳에 들어온 사람들이 충분히 시간을 들여 머무르며 유령들의 존재를 느끼고, 그 유령들이 존재함을 인정하게끔 느슨하게 유도하는 컨셉으로 전시 공간을 기획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획안으로는 답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웃음) 이 질문은 계속해서 저를 괴롭히고, 스스로 의심하게 만들며, 충분한 설명과 설득, 납득을 해내야만 한다는 불안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마치 존재 이유를 설명하고 설득, 납득시키라고 꾸짖음 당하는 것처럼요. 그리고 이 질문과 이 감정은 전시가 오픈되는 날까지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앞에서 구구절절 설명했던 ‘주제와 매체가 맞물리는 맥락’을 가장 강조하고 싶었지만, 결국 저는 이 전시를 왜 해야하는지에 관해 설명하고 설득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인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제 자신이 더 신경쓰였고, 또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전시 자체의 완성도, 더 나아가 전시 작품들의 완성도보다도 그 전시 공간에 어떤 조명을 쓰면 좋을지 끝까지 최선을 다 해 궁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 아티스트 토크를 진행하는 시점에서 전시가 어떻게 기획되고 준비되었는지에 관해 최대한 기억을 더듬어 복기한 내용입니다.
저는 지금 제 생애 첫 개인전에 대해 설명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어떤 요소에 대해 변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가 오랫동안 기억하고 곱씹으며 생각해야 할 문제거리를 알려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왜 두려움과 용기는 공존할 수 없을까요? 왜 초대할 사람이 없으면 전시를 위한 공간이 있어도 전시를 안 하는 게 나은 걸까요? 왜 자기만족을 위해 전시를 할 수는 없는 걸까요? 왜 사람들은 퀴어 문화를 도용하고, 전유하고, 조롱하면서 퀴어들은 그래선 안 되는 걸까요? 왜 우리는 항상 “나만이 할 수 있는 가장 특별한 하나”를 가지고 있어야 할까요? 그리고 왜 그걸 전시 기획안, 포트폴리오, 더 나아가 자기소개서에 반영해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해야 할까요? 그리고 왜 정말로 남들과 다른 존재가 나타나면 그것을 터부시하거나 지난한 것으로 취급할까요?
비록 이 아티스트 토크에서 이 모든 질문들을 다룰 수는 없겠지만, 언젠가는 사람들이 이것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어쩌면 이 질문들을 던지기 위해 저는 올 한 해동안 이 전시를 꾸역꾸역 준비해왔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일동 웃음)
지금부터는 아쉽고,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를 뒤로하고 잠시나마 제 작품들에 대해 자랑스럽게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결국 이건 아티스트 토크고, 제가 제 작품들에 대해 한 줄로 요약되지 않는 설명들을 줄줄이 늘어놓을 수 있는 기회니까요.
저는 오늘 몇몇 작품을 중심으로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2024년에 제작한 “철새들의 집”, “pump up the wreck, kid!” 번들, 그리고 올해 2025년에 제작한 ”to the moon and back” 이렇게 세 가지인데요. 제작 순서로 소개하면서 제가 어떤 생각의 흐름을 거치게 되었는지 설명해보겠습니다.
“철새들의 집”은 SNS와 웹을 매체로 한 일종의 관계 예술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의 고향에서 디아스포라를 겪는 이방인적 경험과 도시 재개발로 인해 터전을 잃어가는 철새들에 관한 환경 문제를 주제로 엮어 기획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제 석사 논문을 위한 작품이기도 한데요, 당시 저는 러스티 레이크 게임사에서 기획했던 대체 현실 게임인 “The white door”와 라리안 게임사의 “발더스 게이트 3”에 빠져있었습니다. 이 두 게임에 관해 잠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The white door는 러스티 레이크 게임 시리즈의 세계관과 캐릭터들을 현실로 확장·연결시켜 플레이어들이 현실에서 퍼즐을 풀고 미션을 해결하게 하는 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플레이어들은 게임 속에 등장하는 전화번호에 직접 전화를 걸어보거나, 게임에서 제공한 웹사이트에 접속해 직접 해킹을 해보는 등 마치 자신이 그 게임 속에 들어가있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저는 당시 이런 형식의 게임 혹은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이것 또한 ‘되기’ 행위와 실천이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반면 발더스 게이트 3는 연구와 관계없이 순전히 제 개인시간을 할애해 애정과 시간을 갖다 바친 일종의 ‘덕질’과 관계 있는데요. (일동 웃음) 이 게임에는 ‘아스타리온’이라는 뱀파이어 남성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첫만남부터 우리를 죽이려 들고, 함께 다니면서는 조금만 선한 일을 하려고 하면 눈치를 주고, 그러다 우리가 이 세계에서 꽤 ‘강하다’는 것을 눈치챈 후로는 급기야 우리를 유혹해 자신을 보호해줄 일종의 포로로 삼으려 합니다. 그러나 아스타리온은 악한 사람이 아닙니다. 게임이 진행될수록 밝혀지는 것은, 아스타리온이 근 200년 동안 뱀파이어 로드의 노예로 생활하며 복수심에 굶주려왔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밝혀진 후 특정 이벤트들을 성공하면 아스타리온이 갑자기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넌 무언가 달라. 넌 사냥감도 아니고, 하룻밤 장난도 아니지. 그렇다면 우린 뭘까?”, “이젠 너와 함께 새로운 삶을 만끽하고 싶어.”
아스타리온의 개인 퀘스트는 게임의 메인 스토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아스타리온의 복수를 완성하지 않아도 우리는 언제든 세상을 구하고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스타리온의 이야기를 모두 알게 된 사람들은 그의 복수를 돕고, 그가 스스로 구할 수 있도록 격려합니다. 오직 이 가상의 캐릭터 하나에게 붙인 애착 하나 때문에요.
그리고 저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애착을 붙일 수 있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고, 대체 현실 게임처럼 그 인물과 상호작용하는 구조의 작품을 만들면 어떨까?” 그렇다면 내가 다른 사람들이 만든 캐릭터에 공감하고 이입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내가 만든 캐릭터에 공감하고 이입하는, 즉 ‘되기’를 행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럴 수 있다면 내가 작품을 통해 하고자 하는 말 또한 비교적 쉽게 가닿을 수 있을까? 사람들이 내 말은 듣지 않더라도, 그들이 정을 붙인 캐릭터의 말은 들어주지 않을까?
그리고 이러한 아이디어를 실험해보기 위해 “철새들의 집”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버디 Birdie’입니다. 참가자들에게 주어진 설명은 “버디는 당신의 오랜 친구이며, 현재는 머나먼 해외로 떠나 있다.”였습니다. 기존에 신청을 받아 모집한 참가자들은 버디의 인스타그램 계정과 서로 팔로우하고, DM을 나누는 등 “현실적인” 상호작용을 하며 애착을 형성할 기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SNS 참여 기간이 끝난 후에는 그간 버디와 상호작용을 했던 참가자와 그렇지 않은 참가자를 구분해 비교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 버디, 그리고 버디의 데스크탑을 탐험할 수 있는 웹사이트, 그리고 기억을 서술하는 터미널에서 행하는 버디 ‘되기’라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저는 관람객들이 버디와 비슷한 디아스포라를 경험하기를, 그리고 그 주제에 공감하거나 이입하기를 바랐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이건 제 석사 논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일동: 웃음, 환호
이렇게 논문을 마치고 홀가분하게 졸업을 한 저는 게임 스토리텔링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 인스타그램에서 홍보하고 있던 “퀴어 게임 진 워크숍”을 발견하게 됩니다. 올해 “연속 종이”를 집필하시고 저랑 같이 군산북페어에도 함께 부스를 냈던 가영님과 독립 출판사 화이트리버를 운영하고 계신 선미님이 주최하신 워크숍이었는데요. 그간 완성도 높은 상업 게임, ‘예술적’인 요소가 가미된 상업 게임, 혹은 아트하우스 게임 같이 세 가지 정도로 비디오게임을 어렴풋이 구분하고 있던 저에게는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는 경험이었습니다. 해괴한, 난해한, 혹은 엉성하고 취약한 인디게임, 혹은 아트 게임, 또는 게임을 매체로 한 일종의 아마추어 예술 작품, 즉 “게임-진”이라는 개념을 배운 것이죠.
하지만 저는 이 지식을 습득한 후에도 완전히 “아방가르드”한 작품을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아직 낯선, 혹은 불쾌한 이야기를 담되, 그것이 지나치게 현학적이거나 은유적인 글을 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이 경험하고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있는 정도의 명료함을 가진 작품을 하고 싶었는데, 그래서 글, 즉 시에서부터 픽션과 미디어의 언어를 가져와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죠. 엉성하고 취약한, 진(zine)처럼 게임을 만들어보기 위해서.
그리고 이 “게임-진”을 처음 실험한 것이 바로 “pump up the wreck, kid!” 번들입니다. “철새들의 집”이 디아스포라의 맥락에서 소속감의 부재를 이야기한다면, 이 번들은 디스포리아의 맥락에서 소속감의 부재를 이야기합니다.
제가 왜 작품이 아니라 ‘번들’이라고 칭하는지 궁금한 분들도 계실 텐데요, “pump up the wreck, kid!”는 하나의 마이크로SD카드에 시 두 편, 실험영화 한 편, 선택지형 웹 게임 한 편이 디지털 파일로 들어간 하나의 집합체이기 때문입니다. 시와 영화, 게임이 서로 스토리가 이어지도록 기획했고, 세 매체 중 하나만 보아도 재밌지만, 전반적인 내러티브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모든 파일들을 파헤치고 자세히 들여다봐야 하도록 설계했습니다.
이 번들이자 시리즈의 주인공은 ‘키드 Kid’입니다. 키드는 자신의 곁에 머무르며 애정을 먹여줄 사람을 찾아 헤매는, 여자도 남자도 아닌 완벽한 중간의 무언가가 되고 싶어하는 존재입니다. 키드는 시에서, 영화에서, 또 게임에서 자신의 곁에 머물렀던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동시에 자신의 곁에 머물러줄 새로운 이들을 찾습니다. 그리고 키드의 주변 인물들 또한 자신만의 삶을 헤매며 어떻게든 꿈과 사랑을 이루고자 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들을 일종의 ‘커밍 오브 에이지’이자 ‘로맨스’ 장르로 생각하며 작업했는데요, 경험해보신 다른 분들은 어떻게 느끼셨는지 궁금합니다.
이 번들, 그 중에서도 영화와 게임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키워드는 ‘복수’입니다. 키드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돌아왔다”라고 말하지만, 그 복수는 결국 사람들을 밀어내고 스스로 고립시키는 행위로 구현됩니다. 그리고 키드와 함께 살았던 또 다른 주요인물인 ‘줄스 Jules’와 ‘마크 Marc’도 2023년에 집필한 시 “buzzcut season”에 이어 게임에서 또한 다시 등장합니다. 줄스는 키드와 마찬가지로, 혹은 반대로, 자신이 곁에 머무를 수 있는 사람을 찾아 헤매는 사람입니다. 줄스는 사랑하는 사람을 찾으면 그들과 함께 살기 위해 키드, 마크와 함께 살던 아파트를 미련 없이 떠나고, 사랑이 실패하면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합니다. 마크는 꿈을 이루기 위해 아파트 뿐만 아니라 ‘언더그라운드’를 곧장 떠나 ‘사회’로 나아갑니다. 제가 이 번들을 작업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이 세 명의 주요인물들이 쩨쩨하거나, 불쌍하거나, 한심하거나, 무정해보일 지언정 “나쁜 사람”으로는 비추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이 번들의 장르를 청춘·로맨스의 일종이라고 일컬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줄스와 마크는 키드가 그들과 함께 영원히 머무르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이루고 싶은 자신만의 목표도 있죠. 이러한 이해관계가 부딪히면 누군가는 소외되거나 도태되기 마련입니다. 키드는 이러한 자신의 슬픔을 타인에게 돌려주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이런 키드를 위해 줄스는 다시 돌아오고, 마크는 머나먼 곳에서 키드를 강하게 만들어 줄, 살아남게 해줄 조언을 해줍니다.
이 셋의 관계를 다른 분들은 어떻게 해석하셨을지 궁금합니다. 저는 어딘가 픽션의 질감이 느껴지면서도 현실적으로 그럴싸한 관계를 만들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마치 우리가 OC가 되어 다른 사람의 OC와 상호작용 할 때처럼요. 같은 맥락에서 여러분은 3인칭으로, 새로운 인물의 시점으로, 그리고 키드의 1인칭 시점으로 이 모든 이야기를 경험하게 되셨을 겁니다. 여러분은 키드가 되어보셨는지, 그리고 그 경험은 어땠는지 또한 궁금합니다.
“철새들의 집”에 이어 “pump up the wreck, kid!” 번들로까지 이어지는 파편화 된 내러티브,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은 여전히 제 관심사인데요. 그리고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앞서 길게 설명했던 주제와 매체의 맞물리는 그 감각과도 또 이어지는 맥락인 것 같기도 합니다. 모든 걸 탐색하지 않으면 이게 어떤 이야기인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도록 정보들과 스토리들을 조각내 이리저리 흩뿌려놓는 거죠. 제가 쓴 글이나 제 언행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던 사람들을 향한 일종의 복수심 아니었을까요? (일동 웃음) 그리고 게임은 ‘상호작용’을 해야만 하기 때문에 ‘되기’를 유도하기 좋은 매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던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마지막으로 “to the moon and back”은 앞서 설명한 두 작품과 아주 다른 결 또는 좌표에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선택지와 변수를 구현하고자 하였지만, 처참하게 실패한 후 모든 책임과 재미를 타인에게 돌렸다고 제작 과정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동 웃음)
이 작품을 한 줄로 설명하자면, “달에 있는 소중한 사람에게, 정부의 검열과 혼란스러운 세상과 돌아오지 않는 답변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계속해서 러브레터를 쓰는 한 장짜리 TRPG 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to the moon and back”은 설명하는 데 어려움이 들지 않습니다. TRPG가 무엇인지부터 설명해야 한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지겠지만요. (일동 웃음) 이 부분은 앞서 동자가 멋지게 설명해주었으니 저는 생략하겠습니다.
이 작품이 제게 특별한 이유는 작품이라는 결과물보다도 이걸 ‘완성’이라고 부르기까지의 과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사적인 기억들을 담은 게임을 만들려 했다가, 구구절절 설명하고 나열하는 것이 지겨워졌고, 게임 엔진을 공부하는 일도 생각보다 어려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는 “발신 오류 에디션” 진에 자세히 나와있죠. 그럼에도 저는 이 ‘아직까지도 이어지는 짝사랑과 미련’이라는 일종의 소재를 빨리 떨쳐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 마침 한 장짜리 TRPG 룰을 만들어 올리는 온라인 게임잼이 있었고, 군산북페어도 다가오고 있었고, 여러모로 이걸 끝내야만 하는 요건들이 맞물린 덕분에 게임을 완성했고, 그 과정을 담은 진도 함께 만들어 보여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TRPG에서 가장 아름다운 점은 컴퓨터로도 구현할 수 없을 정도의 촘촘하고 세세한 엔진인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인데요. 앞서 제가 전시의 주제에 관해 설명하며 인용했던 글리치 페미니즘에서는 인터넷을 “자아영역의 변주를 일으키는 촉매”이자 “자신만을 위한 방”이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제가 당했던 수많은 폭력들은 주로 인터넷 세상에서 일어났었고……. (일동 웃음) 결국 한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가장 솔직하게, 날 것으로, 동시에 가장 섬세하게 가공한 것으로 내보일 수 있는 곳은 비현실, 즉 상상 속, 더 나아가 ‘픽션’이라고 쿠션을 깐 텍스트 속인 것 같습니다.
물론 전시에는 다른 작품들이 많이 있었고 각각 소개하면서 하고 싶은 말도 너무 많지만, 시간 관계 상 이 정도로 이야기하고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전시를 보신 분들이 계시다면 가장 마음에 드는, 혹은 기억에 남는 작품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언젠가는 이것도 함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작가로서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하고자 하는지 간단하게 이야기를 해보려고 하는데요. 저는 일단 시각예술을 그만 할 예정입니다. (일동 웃음) 시각예술을 그만하고 글을 좀 열심히 써보려고 합니다. 시도 꾸준히 쓰고 싶고요. 시를 제가 사실 2023년에 독립출판사 문예지를 하나를 투고하고, 2024년에 세 개를 써서 투고해서 2년동안 총 4개를 쓴 셈인데요. 그리고 올해에는 시집을 내기 위해 6편을 더 썼죠. 그러다보니 양적으로는 굉장히 적게 썼지만 그 과정에서 시를 쓰는 행위 자체에 재미를 다시 느끼게 됐고, 그래서 꾸준히 써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쓰는 김에 에세이도 쓰고 싶고, 희곡이나 시나리오도 써보고 싶다, ‘전시’하지 않아도 되는 걸 해보고 싶다, “전시를 그만 하고 싶다”라고 적혀있네요. (일동 웃음)
그런데 또 동시에 게임도 계속 만들어보고 싶은 것 같습니다. 아트하우스적이고 퀴어적인 게임을 계속 만들고 싶은 동시에, 좀 단어의 조합이 아이러니해서 웃기긴 한데요, ‘상업적인 인디 게임’도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특히 동자와 예하와 예전부터 이야기 나누던 아이디어들이 있는데, 게임 프로그래밍을 열심히 공부해서 언젠가는 구현해보고 싶습니다.
연구적 측면에서는 제 학위 논문 주제였던 “가상의 인물에게 공감하고, 그 공감을 바탕으로 작품의 주제에 이입하게 되는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에도 꾸준히 관심을 갖고 있는데요. 앞으로도 제가 아마추어로서, 혹은 인정받는 연구자로서든 계속 공부해보고, 설령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게 되더라도 계속 관심을 가지고 궁금해하는 주제일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열심히 이 전시와 작품들에 대해 설명이자 설득이자 해명이자 변명을 해봤고요. 저희는 이제 1부를 마무리하고 2부로 한 번 넘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동: (박수와 환호)
동자: 돌아왔습니다. (일동 웃음) 네. 2부에서는 질문에 답하고 좌담회 형식으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Q1. 1부 마지막에서 “앞으로 글에 더 집중할 예정”이라고 하셨는데, 추후 새로 소개하고 싶은 OC나, 더 확장하고 싶은 세계나 이야기가 있는지?
석: 아, 있습니다. 있습니다. 『양질의 (픽셔널) 바이올런스』를 보시면 첫번째 시로 〈생쥐들의 천사〉가 나오는데요. 이 시를 읽다보면 몽타주처럼 영화같은 장면들이 서술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장면들이 사실은 제가 같은 제목으로 만들고 싶었던 추리게임의 스토리를 적용한 건데요. 간략하게 제 머릿속에만 간직하고 있었던 스토리를 풀어서 설명해볼게요. (웃음) 한 동네가 있고, 그 동네 외곽에 있는 거대한 저택에서 아닌 밤중에 불이 난 거예요. 그 저택에 불에 다 삼켜져서 무너질 만큼 큰 불이 났고, 그래서 그곳에 지역 보안관들과 소방관들이 모인 거죠. 그런데 지역 보안관들이 갑자기 FBI 요원들에게 연락을 합니다. “이거 단순한 방화 사건이 아닌 것 같다. 한 번 와보셔야겠다”라고 하면서요. 그렇게 이 추리게임의 주인공인 FBI 요원들이 현장에 도착을 하는데요. 거기서 다 불에 타서 사라지고 있는 저택 뒤쪽 숲에서 청소년 무리가 발견이 됩니다. 그런데 이들을 데려가서 조사해보니 다 전과가 엄청난 거죠. 절도도 있고, 폭행도 있고. 제가 텍스트로는 “들개들”이라고 표현을 했는데요, 정말 들개같은 청소년들이 발견이 된 거죠. 그런데 또 이거에 대해 조사를 하던 중에 이 무리를 이끄는 대장격인 아이가 하나 있고, 그 저택에서 일어난 방화사건에서 생존해 도망을 간 어른들이 있다는 것을 주인공들이 알아내게 됩니다. 제가 이 스토리를 처음 짰을 때 한창 영화 〈롱레그스〉가 개봉을 했던 참이어서, 저도 굉장히 거대한 악이 있는 오컬트 장르의 문법을 적용하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사실은 어떤 거대한 악이 있는 게 아니라, 모두 사람이 저지른 일들이라는 반전을 주고 싶었죠. 이런 식으로 머릿속에서 아이디어들이 뻗어나가면서 만들어진 이야기를 비디오게임 뿐만 아니라 머더 미스터리나 TRPG의 형식으로도 어떻게든 구현을 해보고 싶어요.
제가 아직 어디에 공개를 하진 않았지만 이 시의 시퀄 느낌으로 시를 하나 더 새로 쓴 게 있어요. 그래서 요즘 제 안의 붐은 약간 이 작품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당분간은 이거에 집중해서 이걸 어떻게 조금 더 여러 미디어로 쪼개서 또 이야기를 전개해볼 수 있을까를 고민해보고 있어요.
일동: (박수)
Q2. 시집의 흐름이 옴니버스식 드라마 한 시즌을 보는 것 같이 느껴지는데, 이 시집을 집필할 때 혹은 편집할 때 구체적으로 고려한 지점이 있는지?
동자: 부끄러운 얘기지만, 사실 저는 시집을 잘 못 읽어요. (웃음) 그러니까, 저는 명확하게 떨어지는 텍스트를 좋아하는데 시집은 제가 소화를 못 하는 경우가 많아서 좀 버거워하는 텍스트였어요. 그래서 석이가 처음 이 시집의 편집을 맡아달라고 했을 때 많이 무서웠어요.
일동: (웃음)
동자: 제가 기억하기로는 석이 먼저 말을 해준 게 몇 개 있었어요. 〈우리 세대의 마지막 카우보이〉는 목차 마지막에 있었으면 좋겠다, 〈생쥐들의 천사〉가 앞부분에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형식이 겹치지 않고 다양하게 여러번 와리가리 했으면 좋겠다 같이요. 그런 것들을 중심으로 염두에 두고 석이와 함께 목차를 짰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런 심상을 추구했습니다.” 정도는 말을 할 수 있겠지만, 그걸 말하는 것 자체가 시집을 제한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저는 늘 “읽으신 대로”? (일동 웃음) 읽는 사람이 해석하는 대로의 심상이 이 시집의 심상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애초에 내지 디자인을 통해 할 말은 다 했다고 생각해요, 저는.
석: 제가 목차 짤 때 그런 말을 했군요.
일동: (웃음)
석: 저는 사실 시를 쓰는 걸 어디 가서 배워본 적이 없어요. 거의 초등학생 때부터 냅다 혼자 쓰기 시작했고, 중간에 그만두고 한 편도 안 쓰던 공백 기간을 길게 자주 가졌어요. 이제와서야 글을 계속 써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쓰기 시작한 건데요. 그런데 제가 어렸을 때에는 혼자 생각할 시간도 더 많았고, 또 머리가 되게 잘 돌아갔었어요. 그런 아이로서 당시에 제가 시를 쓰려고 할 때에는 그냥 가만히 있어도 문장이 계속 떠올랐어요. 그러니까 문장들을 모으면 한 편의 시가 되고 그런 식이었는데……. 점점 전두엽이 성장을 멈추기 시작할 때 즈음부터는 시를 안 쓰고 있다가 다시 쓰려고 시작하니까 갑자기 막막한 거죠. 시란 무엇이냐? (일동 웃음) 시라는 건 무엇이고, 어떤 시가 ‘완성된’ 시인가? 이런 것들을 고민해보면서 거의 처음으로 다른 시인들의 작품을 읽고 공부를 해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는 한 번도 그런 ‘연구’의 필요성에 공감을 못 했었는데, 이제 진지하게 해보려니까 그게 사실은 되게 필요한 일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은 거죠. 그렇게 서점에 갈 때마다 시집 코너를 돌면서 이것저것 읽어보다가 제가 지금도 좋아하는 김 현 시인의 『글로리홀』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 시집에 수록된 시들도 일종의 아이콘이나 캐릭터를 차용해서 서사를 진행하는 형식이 많아요. 그래서 그거를 제가 베낀거죠. (일동 웃음) 그 형식을 베끼고 나만의 OC를 넣어서 쓴 시가 2023년에, 거진 몇 년만에 처음 쓴 시인 〈buzzcut season〉이었어요. 그후부터 지금까지도 계속 제 OC들을 넣어서 이들이 겪을 만한 일을 상상하고, 그런 존재들을 위한 세계관을 만들어 덧붙이고 그러면서 쓰기 시작한 것 같아요. 그런데 시집 중간중간에는 또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시들도 있는데요, 이런 것들은 약간…… 형식적으로 실험을 해야한다는 강박? (웃음) 김 현 시인을 시작으로 여러 국내 시집들을 읽어보면서 “아, 국내의 동시대 시는 되게 다양한 실험을 하는구나” 싶더라고요. 텍스트만 있는 게 아니라 일러스트도 들어가고, 글자가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하는구나. 그런 걸 보면서 그런 형식들을 또 열심히 베껴서 “그래도 목소린 내 거야” 하면서 짜집기 연습을 한 것 같아요.
Q3. 두 분이 시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최애 시는 무엇인가요?
동자: 저는 카우보이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웃음) 일단 저는 카우보이 이야기를 정말 좋아하고요. 그리고 이 세계 자체가 굉장히 디스토피아스러우면서 또 쓸쓸하기도 하고, 그래도 아무튼 살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사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이라서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석: 시집을 디자인하신 예하의 최애 시는 무엇인가요?
예하: 저는 하나만 꼽을 수가 없어서 탑 3를……. (웃음) 일단은 〈buzzcut season〉. 이 시에는 제가 남다른 애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게, 석이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굉장히 오랜만에 쓴 시기도 하고, 그래서 그걸 처음 읽어봤을 때 느꼈던 감회가 남달랐던 기억이 있어요. 그리고 그때 그 시를 만들었을 때 제가 작게 시 자체를 진으로 만들었었어요. 전시에도 PDF 파일로 비치되어 있었어서 보셨을 수도 있겠네요. 어떻게 보면 석이의 시와 함께 합작을 한 첫 작품이기도 하고, 그런 제 개인사가 엮인 애정이 묻어있는 시라서 뽑고 싶고요.
그리고 저도 서부극을 좋아해요. (일동 웃음) 그래서 처음 〈우리 세대의 마지막 카우보이〉 원고를 받았을 때에도 바로 집중해서 읽었던 기억이 있어요. 동자와 거의 다르지 않은 이유로 좋아하는 시예요. 마지막으로는〈생쥐들의 천사〉. 이것도 개인적인 이유이긴 한데, 앞에서 얘기한 게임 스토리를 석이가 저한테 알려준 적이 있어요. 그때 그 스토리를 듣고 “아, 꼭 만들어줬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석: 맞아. 그때 제가 “이런 아이디어가 있는데 어때?” 하면서 노션 페이지에 줄글을 막 써놓은 걸 보여줬었어요. 그런데 그 중에 아직도 기억나는 문장이 들개들로 불리는 청소년들과 그들의 우두머리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괄호 열고 “대장이 예수인가요?” (일동 웃음) 그리고 아랫줄에 “그리고 이 들개들의 분위기는 슬램덩크의 풍전 고교 느낌으로.”가 있었어요.
동자: 예수가 에이스 킬러였군요… (일동 웃음)
예하: 말한 것처럼 우리들의 이런 오타쿠 취향이 가미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 이야기의 일부가 이 시로 구현됐을 때 되게… 좋았어요.
석: 그리고 약간 글 뿐만 아니라 OC끼리의 공동창작이나 TRPG 마저도 사실 본인의 ‘씹덕’적인 취향이 가미되지 않으면 정이 안 붙잖아요.
예하: 맞아요.
석: 재미가 없으니까.
동자: 추구미가 다르니까.
석: 저도 약간 동자가 얘기한 것처럼 명료하게 읽히는 글을 좋아하고, 제 추구미도 그렇거든요. 비유나 메타포를 사용해도 무슨 얘기인지는 감이 잡힐 정도의 명료함을 가진 시를 쓰고 싶은데, 어떻게 보면 문장이 명료한 글은 재미가 없게 느껴질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이런 형식을 유지하면서 내가 재밌는 글을 쓰려면 ‘소재’가 재밌어야 한다, 그리고 이 소재가 재밌으려면 내 취향에서 시작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동자가 시집에 헌사 페이지를 만들자고 했을 때 부끄럽지만 좋았어요.
맞다, 그리고 이 페이지를 다시 보다가 첫번째 질문에서 언급하는 걸 까먹은 게 생각났는데요. 제가 여기 적힌 것처럼 레딧 괴담을 좋아하거든요. 유튜브 썸머썸머 같은 채널에서 범죄 이야기해주는 영상도 좋아하고요. 그런 형식이나 장르적 특성을 띄는 글을 써보고도 싶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Q4. 전시 공간 및 동선의 흐름은 어떤 의도를 담고 있는지?
예하: 질문에 조금 덧붙이자면, 저는 일단 전시가 몸을 움직이며 봐야하는 구성인 점이 가장 흥미로웠어요. 전시장을 들어가자마자 오른쪽 벽에 배치되어 있던 사진 작품부터 그냥 단순히 서서 보는 게 아니라 각자 휴대폰의 플래시라이트를 사용해 빛을 비추어 봐야했고요. TRPG를 할 때에는 그 앞에 의자를 두고 앉아서 주사위를 굴리고, 텐트에 들어가서는 바닥에 주저 앉은 채로 수구려서 노트북을 해야하고, 매트리스 위에는 눕거나 엎드려서 작품을 보기도 하고요. 자세를 여러 번 바꿔가면서 작품을 관람을 하는 구성이었죠. 동선을 따라서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자세가 낮아지는 그런 흐름이 인상깊었어요. 그래서 어떤 맥락에서 이런 몸짓을 유도하는 동선이 만들어졌는지 궁금했습니다.
석: 사실 이 공간 기획안을 만들 때에도 제가 좋아하는 밈을 사용했는데요. (일동 웃음) “게이밍 셋업 밈(gaming setup meme)”을 검색하면 나오는 이미지들을 아시나요? 그 이미지들 중에 텅 빈 방에 매트리스, 노트북, 간이의자, 간식만 있는 한 특정 이미지를 제가 가장 좋아해요. 그래서 그 이미지를 실제로 전시 기획안을 처음 쓸 때 공간 구성 섹션에 넣어놨었어요. 특히 제가 게임이라는 매체를 작품으로해서 전시를 하는 거다 보니까 일단 화이트큐브식으로 전시를 하기가 싫었어요. 어떤 방향이든 상관없지만 일단 화이트큐브를 최대한 지양하는 게 첫 번째였고요. 그리고 게임을 예술 작품으로 느껴지지 않게 하고 싶다는 생각도 좀 있었던 것 같아요. 특히 「pump the wreck, kid!」 번들 같은 작품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사실 플레이시간이 길진 않지만 텍스트양이 꽤 되잖아요. 앉은 자리에서 파악해야 할 정보도 많고요. 그런데 이걸 전시장에서 사람들이 발견했을 때 “어, 게임이다.”하면서 클릭 몇 번 하고 그냥 지나가게 하고 싶지 않았던 거죠.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엔딩을 보고 처음 시작 페이지로 돌아오기까지의 시간 동안 사람들이 진짜 집중할 수 있도록 붙잡아두고 싶었고, 그러려면 진짜 게임을 할 법한 공간처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런 아이디어들이 이 밈 이미지까지 이어져오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사실 이미지로 보면 웃긴데, 사실 저런 환경에서 노트북에 충전기 꽂아놓고 게임 하면…….
예하: 8시간도 거뜬히 하잖아요. (일동 웃음)
석: 그냥 해 뜰 때까지 하는 거죠. (웃음) 그런 걸 유도하고 싶었어요.
동자: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난 건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했던 전시인《게임 사회》를 보러 간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게임에 관련된 전시였음데도 불구하고 게임을 하나도 못 하고 나온 거죠, 제가…….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기기가 안 되거나, 줄이 너무 길거나, 플레이시간이 너무 길거나 하는 여러 문제로 인해서 게임을 못 하고 나왔다는 게 너무 억울하고 짜증이 났었던 사람으로서 석이 이야기한 취지에 굉장히 공감이 됩니다.
석: 그리고 이건 많은 분들이 모르셨을 수도 있는데, 제가 사실 도슨트를 할 때 관객분들께 오래 기다려야 하거나 자리가 불편한 경우에는 개인 USB로 파일을 베껴가도 된다고 안내를 했었어요. 특히 ‘전시’의 특성 상 기기 하나에 하나의 게임이 들어가잖아요? 그 형식에도 좀 의문이 들기도 하고, 불공평하다는 느낌도 받았어요. 작년에 봤던 《포에버리즘》 전시의 경우에도 isvn의 비디오게임 작품이 복도에 컴퓨터로 설치되어 있었는데, 여러 게임들 각각의 플레이타임이 꽤 됐던 거죠. 그런 게임들을 한 컴퓨터 당 하나의 작품만 넣어둔 거예요. 그래서 다음 게임도 해보고 싶었는데 그 자리에 앉아있는 다른 관객이 아직 하는 중이라 나갈 때까지도 그 게임은 못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래서 여담이긴 한데, 저는 전시장에 있던 3대의 노트북에 모든 디지털 파일을 다 넣어두려고 했었어요. 리플렛에 어느 작품을 여기에서 관람할 수 있다고 안내가 되어있긴 하지만 사실 앉은 자리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모든 작품을 볼 수 있도록. 그런데…… 그러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그래서 그 부분은 추진을 못 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만약 추진할 수 있었다면 사람들이 기다리지 않고 작품들에 더 집중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조금 있고요.
저희 이제 질문은 마무리하고, 남은 시간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예정인데요. 특히 제가 전시를 준비하는 기간에 많은 일이 있었잖아요? (일동 웃음) 올 한 해를 겪으면서 들었던 생각들을 허심탄회하게 얘기해보려고 해요. 아티스트 토크를 준비할 때 동자와 함께 “이런 얘기를 하면 재밌겠다” 하면서 적어놓은 주제들이 있는데요, 이걸 중심으로 얘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동: (박수와 환호)
동자: 이 주제는 석이와 제가 공유하는 것 같은데요, 저는 그런 말을 되게 많이 들어왔거든요. “너는 좋은 편집자가 될 만한 건 맞는데, 팔리는 편집자는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우리 출판사에서는 함께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같은 말들이요. 주제 의식도 참 좋고, 좋은 콘텐츠를 잘 발굴하는 능력을 가졌지만, 그게 시장에서 팔리는 콘텐츠는 아니라는 거죠. 이런 말을 작년에 출판학교를 다니면서부터 굉장히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네 취향은 정말 독특하고 마이너해. 그게 좋긴 하지만 상업적으로나 커리어적으로 네게 도움이 되진 않을 거야.” 같은 말도요. 그런데 그게 저잖아요. 그걸 바꿀 수는 없고요. 그럼에도 이걸 노동을 하면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어느정도 희석해야 하는 부분이 있고. 석이도 이런 류의 고민을 회의록에 적어놨더라고요. 예를 들어 “독립예술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먹고 살 만한 일이 안 된다”, “제도에 편입하기 위해서는 내가 아닌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 같은 답답함도 느껴지고요. 이 부분에 관해 이야기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우리를 집어삼키는 이 자본주의라는 간악한 체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일동 웃음)
석: 맞아. 제가 1부에서 제 이야기를 시작할 때 “자본주의와 제도권이 인정하는, 그럼으로써 권위가 제공하는 복지의 범위에 포함되는 창작자가 되고 싶다”고 언급을 했었는데요. 올 한 해 동안 제가 돈을 벌려고 여러 일을 해봤거든요. (일동 웃음) 커미션도 열었다가, 스타벅스 들어가서 바리스타 일도 했다가, 다른 알바 구해서 투잡도 뛰어보고……. 7시에 일어나서 9시까지 출근한 다음에 12시에 퇴근하고, 다시 3시까지 출근했다가 8시까지 일을 하고, 이런 걸 몇 달 동안 반복을 해봤어요. 안 돼. (일동 웃음) 이건 안 돼. 이렇게 살아서는 알바를 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생계를 위해 알바를 하는 창작자가 아니라, 그냥 알바 ‘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거죠. 왜냐하면 나한테는 정해진 체력이 있고 쓸 수 있는 시간이 있는데, 그걸 전부 돈 버는 데에 써버리니까. 그런데 심지어 그 돈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어요. 만약 제가 그만큼 신체적·정신적으로 무리해가며 노동을 하고 한 달에 500만원을 벌었으면 “창작?” 하면서 그만뒀겠죠. (일동 웃음) “창작 왜 해?” 하면서 저도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었겠지만… 최저시급 받으면서 그렇게 매일 한다는 게, 철없이 들릴 수도 있지만, 굉장히 부당하게 느껴졌어요. “내가 왜 창작자가 되겠다는 선택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해야 하지?” 하는 억하심정도 조금 있었던 것 같고요.
그러면서 찾아봤는데, 우리나라에 예술인 복지가 잘 되어 있더라고요. 타먹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행정 자체는 촘촘하게 잘 되어 있거든요. 특히 “예술활동증명”을 하면 그 지원들을 탈 수 있게 되어있는 시스템이에요. 파견 사업을 나갈 수 있게 된다거나, 생활금 대출을 받을 수 있다거나, 창작지원금을 받는다거나, 그런 식으로. 그런데 그걸 위해 예술 활동 증명을 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신진예술인활동증명”이 되어 있어야 해요. 그런데 또 신진 증명을 하려면 근 2년 내에 개인전 1회 이상 혹은 단체전 몇 회 이상 같은 조건이 또 붙는 거죠. 그러니까 이게, 이미 전시를 할 만큼의 작품, 인맥, 돈, 시간이 있어야 하는 거죠. 신진 예술인 활동 증명을 해서 추후에 예술 활동 증명이 가능하려면. 그래도 저는 하자센터에서 지원을 받은 덕분에 최대한 적은 돈으로 전시를 할 수 있었는데, 더 찾아보니 전시 자체를 증명하기 위한 부가적인 자료도 준비해야 하는 게 너무 많은 거예요. 하려면 하죠. 그런데 약간…… “아, 이렇게까지?” (일동 웃음) 그리고 심지어 서울문화재단에서 1년에 한 번씩 크게 예술지원사업을 열잖아요? 그 사업이 시각예술의 경우에는 트랙이 나뉘어져 있어요. 신진은 A트랙, 중견은 B트랙, 이런 식으로 연차 별로 나눠서. 그런데 신진 트랙에 들어가서 자격 요건을 보면 이미 ‘첫 발표’를 한 후여야 해요. 그러니까 신진예술인이 되려면, (웃음) 그러니까, 신진 예술인으로서 국가에서 돈을 받아서 창작을 하려면 신진예술인 활동 증명이 될 만큼의 자격이 갖추어져 있어야 하는데, 그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국가에서 지원해주지 않는 이미 나의 돈과 시간과 자원을 들여서 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거죠. 저는 운이 좋게 지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걸 알아보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내가 만약 하자센터에서 지원을 받지 못했으면 돈이 얼마나 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먼저 들었어요. 만약 100-200만원이 든다고 치면, 그 돈은 내가 알바 두 개를 병행했다고 해도 거진 세네 달을 일해야 모을 수 있는 양인데, 그럼 지금까지 신진 예술 활동 증명을 마친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해서 활동을 증명한 다음 개인전을 또 한 번 더 하고 ‘진짜’ 활동 증명을 한 거라고? 그럼 그때까지는 대체 뭘 먹고 살아남은 거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그래서 우리나라 복지가 잘 되어있다고는 하지만 계속해서 뭘 너무 많이 증명하라고 한다고 느꼈어요. 물론 이해는 해요. 나랏돈을 낭비하거나 빼먹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되니까 검증을 철저히 하려고 하는 건 알겠는데, 그럼 원래 돈이 있어서 애초부터 생계 걱정 없는 예술가들은 이게 오히려 어렵지 않을 거잖아요.
예하: 접근성의 난이도에서부터 차이가 나는 거죠.
석: 이미 돈이나 자원이 있는 사람들은 탄탄대로로 갈 수 있고, 아무것도 없이 냅다 시작한 사람들은 너무 진입하기 힘든 ‘그사세’ 같은 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시각예술을 그만하려고 하는 것도 있어요. 너무 돈이 많이 들기도 하고. 그리고 사실 그동안의 세미나나 합평 같은 데 참여했던 경험으로 봤을 때…… 사람들이 너무 재수없더라고요. (일동 웃음) 좀 선민의식이 있더라고요, 사람들이. 예술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래서 재미가 없었어요.
동자: 그런데 그게 어떤 형태의 학술 공동체든 간에 다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다 고여있고, 게이트키핑(gatekeeping)이 철저하게 되어있고. 저는 그걸 출판인들의 모임이나 독서 모임에 가서도 가끔 느껴요. 그리고 인문학을 한다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자 하면 그 사람들이 보기에 내가 갖고 있는 지식은 지식도 아니겠구나, 하는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너무 많거든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거기에 되게 소속되고 싶어요. 거기에 소속되었다는 건 내가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기도 하고, 내가 학문적으로 어느 정도에 다다랐다는 것이기도 하고, 그리고 학위도 있겠죠. 그런데 동시에, 거기 끼기 싫어. (일동 웃음) 너무 싫어. 재수없어!
석: 근데 끼고 싶어! (웃음)
동자: 맞아. 그 양가감정이 너무 느껴지는 거죠. 사실 저도 아까 되게 공감했던 게, 저는 출판이 좋아서 여기에 있는 거지만, 그게 제 전부는 아니었으면 좋겠거든요. 이건 돈을 버는 일이고, 취미에 품을 더 들이고 싶은데, 일을 하고 집에 들어오면 너무 피곤해서 다른 걸 할 여력이 조금도 나지 않는 거죠. 8시에 퇴근해서 너무 피곤해 누웠는데 눈을 뜨면 7시야. 그럼 다시 출근을 해야 해. 이런 날들이 계속 반복되는 거죠. 그래서 너무 스트레스를 받죠. 그런데 회사에서 하는 일도 원고가 제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많아요. 아직 제가 그걸 결정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기도 하고. 그럼 이제 제가 읽지도 않을 원고에 이렇게까지 품을 들여서, 저자보다 내가 더 발을 동동 구르면서, 디자이너를 쪼고, 저자를 쪼고, 누구를 쪼아서 겨우겨우 책으로 만들고, 그런데 책으로 나왔는데 안 팔리고. 그럼 이제 제가 한 일은 다 말짱 도루묵이 된 것 같다는 평가를 받거든요. 열심히 일한 건 알겠는데 잘 팔리진 않았으니까, 결론적으로는 아쉽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듣고. 그럼 이제 내가 여기서 시간도, 돈도, 체력도 날리고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런 생각이 가끔 드는 거 같아요…….
석: 그러니까, 뭐 어떻게 죽어드려요? 이럴 수도 없고.
일동: (웃음)
동자: 노동하고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 지를 늘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아요.
석: 저도 올 한 해동안 계속 했던 고민이 “창작과 노동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지”였거든요. 일단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 돈을 벌고, 남는 시간동안 최대한 창작을 하자, 둘 중 하나는 뭐라도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런데 계속 시도해봐도 답이 안 보이더라고요. 물론 이걸 성공한 분들도 많이 계시죠. 예를 들어서 디자인과에 재학하면서 외주로 돈을 벌고 남은 시간에 시를 써서 출판하시는 조까의 민우님처럼요. 저도 그럴 수는 있었죠, 엄밀히 말하면 저도 디자인과니까. 하려면 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 디자인이라는 전공을 한 번도 진심으로 좋아했던 적도 없었고, 이걸 내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스킬을 업해서 내가 얼마나 특별한 디자이너인지를 열심히 이빨을 까고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서 돌리고 일을 구하고 그러기가 너무 싫은 거예요. 디자인과 특성 상 주변에 디자인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열심히 하는 학우들이 많았는데, 그들을 볼 때마다 “아, 나는 디자인을 해봤자 바닥이다”라는 생각이 드니까요. 또 편의점 알바를 두 개를 병행하면서 시를 쓰시다가 유명해져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신 분의 경우도 제가 들은 적이 있어요. 그러니까 결국 비슷한 계열의 일을 하거나, 다른 일을 하다가 둘 중 하나가 대박이 나거나 둘 중 하나의 방법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죠. 창작과 노동이라는 삶의 밸런스를 영원히 유지할 수는 없구나. 특히 21세기의 자본주의가 잡아먹는 사회에서는 절대 창작과 노동을 분리해서 유지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절망스러웠고요. 당장 내년에도 어떻게 생계를 유지해야 할 지 고민이 많이 되는 것 같아요. 창작자들은 대체 뭘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는 건지? 부모 등골을 빼먹거나 내 등골을 빼먹는 방법밖에 정말 없는가? 하는 회의감도 들고요.
그래서 이야기의 원래 그 주제로 돌아오자면, 결국 저는 예술인 활동 증명을 해서 국가가 제공하는 복지를 받고 싶었던 건데, 알고 보니까 이 모든 복지가 ‘신진’예술인한테는 또 안 되는 거였던 거죠. 파견도, 창작지원금도. 모두 최소 1년 후에 활동 증명을 다시 해서 ‘진짜’ 증명이 된 후에야 지원이 가능하고요.
동자: 그런데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한 명이 띵까먹는 돈이랑 국회의원이 해먹는 돈이랑 비교하면 당연히 후자가 훨씬 클 것 같은데……. (일동 웃음) 그럼 그거나 잡아야지 왜 복지 재단에서 이렇게까지 검열을 열심히 하는지를 잘 모르겠어요.
석: 그리고 약간, 저한테만 국한된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제 작품들은 ‘전시’가 될 필요가 없잖아요. 그런데 시각예술로 활동 증명을 하려면 그 활동 기준이 수익 혹은 전시 횟수거든요. 그럼 또 이제 “왜 전시가 기준일까?” 하는 의아함이 들고요. 왜냐하면, 덧붙여서, 그 전시에 북페어 같은 건 포함이 안 돼요. 화이트큐브, 혹은 ‘진짜 갤러리’에서 하는, 그래서 그 계약서가 발행되는 전시 공간에서 하는 ‘진짜 전시’만 쳐주는 거죠. 그래서 시각예술 활동이 전시로만 증명될 수 있다면 전시 대관료를 못 내는 창작자들은 어떻게 활동 증명을 하는 거지 싶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런 점에 대해서 다른 창작자들이 강연이나 토크에서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런 류의 이야기는 아예 하지 않거나, “그냥 친구들이랑 돈 모아서 단체전으로 내세요.” 하고 마는 거죠.
동자: 진짜 모르겠다……. (일동 웃음) 그러니까 결론은 개인이 좆뺑이를 치라는 거잖아요?
석: 그쵸. “난 모르겠고 니넨 뺑이 쳐라”. 그래서 그런 점들에서 회의감을 많이 느껴서 시각예술을 그만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강하게 들었던 것 같아요. 글로 돈을 버는 방법을 찾든, 독립출판을 하든, 게임을 만들어서 유통 판매를 하든 다른 일을 해보고 싶어요. 그런데 또 이제 책을 만드는 건 너무 재밌었는데, 북페어는 좀……. (일동 웃음) 북페어도 할 말이 너무 많아요. 힘들어. 앞에서 말했던 그 “영업사원이 되는 감각”이 견디기 힘들었던 것 같아요.
동자: 공감해요. 제가 관객으로 가든 파는 사람으로 가든 힘든 것 같아요. 관객으로 가면 자꾸 저한테 뭘 파셔야 하니까 설명을 너무 열심히 하시고, 그 결론이 판매로 귀결되어야 하고 그런 게 너무 힘든데. 막상 그 부스로 나가면 어떤 사명감이 생겨요. “팔아야 한다” 같은. (웃음) 그래서 괜히 오는 사람 붙잡고 말도 엄청 많이 걸고, 5분 내에 최대한 빨리 라포를 쌓아서 한 권 팔아야 하고, 이게 하다 보니까 너무 현타가 오는 거죠.
석: 맞아…. 저는 올해 군산북페어가 부스로 참여한 생애 첫 북페어거든요. 그런데 제일 힘들었던 게 뭐냐면, 제가 낯을 가려가지고……. (일동 웃음) 그래서 영업이 유독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거니와 그렇게 설득하고 납득을 시켜서 ‘영업’을 해야한다는 그게 너무 싫은 거예요. 사람들이 알아서 보고, 자유롭게 사는 게 자연스러운 북페어의 맛이라고 생각을 해왔는데, 막상 저도 이 책이랑 게임들을 팔아야 생활비가 벌린다고 생각하니까 처음부터 되게 간절하게 팔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설명을 하고 나면 사람들이 “아, 네.” 하고 그냥 가버리는 거죠. 그리고 다음 사람이 오면 그걸 반복하고. 그러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제가 잠깐 노트북으로 뭘 하느라 책 설명을 못 하고 편하게 보시도록 놔뒀는데, 시집을 펼쳐서 보시다가 “야, 이거 봐. ‘싸고 맛있잖아’ 이 지랄.” 하면서 그대로 책을 던지고 가시는 거예요.
동자: 어머, 싹퉁바가지 없어.
석: 그래서 저도 그걸 보자마자 “씨발, 미쳤나?” 싶다가도, (일동 웃음) “아, 돈을 쓰러 온 사람들 눈에 내 시는 이렇게 읽히는구나.” 싶어서 현타가 오기도 했고요. 그러니까, 국내에서 독립출판이 일종의 ‘붐’이잖아요. 모르겠어요, 알고 좋아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동자: 그런데 저는 과연 그게 ‘붐’일지에 대해서 늘 회의적이에요. 예를 들어서 서울국제도서전에 사람이 많이 오는 건 맞지만, 결국 돈을 쓰러 온 사람들은 사실 대형출판사에 쓰러 온 것이고, 국내 독립출판사나 소형 출판사는 사실 거기서 발품을 팔아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그런 행태가 이루어지고 있으니까요. 부스비 본전 뽑기도 굉장히 어렵다고 들었거든요. 우리 입장에서 꽤 유명한 출판사도 그런 부분에서 꽤 고전을 했다고 들었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큰 돈을 벌기 위해서는 그만한 돈을 이미 투자할 수 있어야 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고, 사람들은 책을 읽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책을 사는 나’를 뽐내고 싶어서 사는 거고, 이런 상황이 계속 겹치다 보면 지금 출판계도 포화상태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사실 문학 시장은 ‘붐’이고 커지고 있는데, 비문학 시장은 작아지고 있어요. 그래서 굉장히 좋은 논픽션을 내는 대다수의 출판사들이 오래 고전을 하고 있고. 그리고 사실 문학을 내는 출판사도 이미 이름이 있는 작가의 책만 잘 팔려요. 그런데 또 그 이름이 있는 작가를 섭외하려면 출판사가 커야 하고. 그리고 대형 출판사가 유명한 작가들을 쓸어가서 그 돈을 엄청나게 많이 벌고 그 돈을 다시 마케팅 등에 투자를 해서 다시 돈을 버는 악순환적인 구조가 반복되고 있고요. 그 과정에서 사실 이게 잘못되지 않았나 하고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거죠.
석: 북페어도 사실 이미 유명한 출판사들의 부스만 유명하고, 유명하지 않은, 이제 발품을 팔러 나온 부스의 경우에는……. 그러니까, 책이라는 건 결국 매체잖아요. 그 매체 안에 들어간 콘텐츠가 저는 제일 중요하고, 기반이고, 의미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데 이제 ‘예쁘기만 한 책’이 너무 많다고 느꼈어요. 그걸 사서, 인스타에 찍어서 올려서, 그렇게 피드나 스토리를 에스떼띡하게 꾸밀 수 있는 그런 디자인의 책들. 물론 예쁘지. 보기 너무 좋지. 나도 갖고 싶고. (웃음) 하지만 “내가 이걸 사서 집에 가져가면 열심히 읽을까?”를 생각하면 아닌 것 같은 거죠. 그냥 집에 걸어두고 장식으로 쓸 것 같은 거죠. 그런 책들이 너무 많다고 느꼈고, 그런데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북페어에 사람도 너무 많고 그 사람들이 다 좁은 부스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복도에 몇 시간동안 서서 돌아다녀야 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글이 많이 들어가 있거나 이 콘텐츠가 뭔지 길게 설명해야 하는 부스에 사람들이 머무르기 싫어하는 거죠.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북페어는 약간 제가 전시 공간을 기획할 때 떠올렸던 그런… 다같이 앉아서 자유롭게 읽어보면서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스스로 탐색해서 판단하고, 마음에 들면 구매하는 그런 구조였던 것 같아요. 제가 올해 경험한 북페어들은 그냥 대형출판사에서 나온 유명한 책을 몇 천원 싸게 구매하기 위해 오거나, 예쁘고 돈을 많이 들인 디자인 제품을 사기 위해 오거나 한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런데 또 들었던 생각이, 그 북페어들이 제 시집이랑 게임들이 비치가 되어 있었잖아요. 그 부스들을 지나가면서 봤는데 저도 모르게 “아, 디자인 더 예쁘게 할 걸.” 하고…….
동자: 우린 예쁘게 했어! 우리 시집 얼마나 예뻐! (일동 웃음) 얼마나 예뻐! 듣지 마! 넌 최고의 시집이야!
석: (웃음) 아니, 그러니까, 흑백 말고 좀 화려하게 할 걸. 색도 많이 넣고, 리소 프린트도 해보고, 그런…. 그랬어야 했나? 그렇게 했으면 더 많이 팔렸을까?
예하: 괜히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는 거죠.
석: 맞아, 괜히. 자꾸 비교하고 자괴감 들고 하니까.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어떻게 결론을 내야 할지를 모르겠는데, 글쎄요. 결론을 우리끼리 낼 수도 없는 것 같고. 결론을 억지로 내봤자 사실 의미 없는 행위인 것 같기도 하고요. 왜냐하면 우리가 결론을 낸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니까. (일동 웃음)
동자: 그냥 망했다. 다 죽자.
석: 〈임의 접속〉에 딱 그런 구절이 나와요. “괜찮아. 테스트같은 건 없어. 우린 그냥 아메리칸 드림처럼 다 죽을 거야. 우린 다 좆된 거야. 그래도 괜찮아. 적어도 우리가 곧 죽으리란 건 알았잖아.” (일동 웃음)
동자: 적어도 내 감정들은 모두 진짜였으니까.
석: 적어도 내 감정들은 모두 진짜였으니까……. 그런데 이거 진짜 어떻게 마무리하죠?
동자: 한 마디씩 하면서 마무리할까요?
석: 그럼 동자 먼저. (일동 웃음)
동자: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서 너무 웃기고, 이게 뭐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웃음) 이런 문제의식을 가진 게 혼자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는 건 늘 좋은 것 같아요. 저는 늘 마음 한구석에 “출판계 다 망해라”, “다 죽어라”, “다 죽자”라는 안 좋은 마음가짐을 좀 가지고 있어요. 내가 좋아해서 하는 일이라고 해서 늘 좋아하기만 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좋았습니다. (웃음)
예하: 이렇게 결함 많은 방식으로 다른 것의 결함을 지적하는 자리를 가질 수 있어서 좋았고요. 좋네요. 이런 자리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허심탄회하게 많은 창작자들이 떠들 수 있는 자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아요.
석: 사실 개인전을 하는 게 제 오랜 버킷리스트였어요. 그런데 올해 딱 해보고 나니까, 다신 안 해도 되겠더라고요. (일동 웃음) 올해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뿌듯함보다는 아쉬움이 더 커서 그 점이 가장 아쉬웠던 것 같아요. 그래도 이렇게 뜻이 맞는 동지들끼리 모여서 이야기도 나눠보고, 이런저런 질문들도 던져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이 토크가 원래 지금처럼 녹음을 하려던 게 아니라 자리를 잡고 진짜 공개적으로 하려고 했었잖아요? 그런데 일이 틀어져서 이렇게 됐는데, “아, 그렇게 했으면 큰일날 뻔 봤다”, “그렇게 했으면 이렇게 재밌게도 못 했고 솔직하게도 못 했다” 싶더라고요. 잘 모르겠어요. 제 작품들도 그렇고 제가 창작한 세계의 존재들은 항상 그 어딘가에 속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데, 그게 제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정작 올해를 되돌아보면 어느 하나의 공동체에 온전히 속하는 게 굉장히 위험할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속된 말로 “고이면 좆된다”는 게… (웃음) 유독 피부에 와닿았던 한 해였습니다.
그래도 어찌저찌, 전시도 끝냈고, 시집도 냈고, 토크까지 이렇게 잘 마무리하네요? 이게 다 동자와 예하의 (일동 박수와 환호) 건설적인 피드백과 무조건적인 칭찬 덕분입니다. 앞으로도 셋이 이것저것 재밌는 걸 해봤으면 좋겠어요. 우리… 굶어죽지 말고 오래오래 살아요!
일동: (박수와 환호)
석: 여러분, 지금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하고요. 저희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팟캐스트로, (일동 웃음) 혹은 책으로 돌아오거나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고, 노력하는 일마다 잘 되시고, 자살하거나 굶어 죽지 마시고, 타협하지 마시고…….
예하: 아무튼 화이팅하시기 바랍니다.
일동: (박수와 환호, 웃음)